발행일자 : 2022년 10월 1일 광고문의 즐겨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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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옛 동산에 올라 ③ 나의 소년시절과 청년 ‘월남전참전’ 이야기
작성자 kookbangco

❙옛 동산에 올라 ③ / 김행열 국방전우신문 광주지사 회장







 

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월남전 참전’ 이야기


간절히 바라는 것 하나 있다면

‘기회 균등과 형평의 원칙’ 중요

아직도 ‘전선 악몽’에 깜짝 놀라




실탄 제거술을 하고 압박붕대로 지혈을 한 후 일어섰을 때 소대장께서 1소대 전원을 향하여 “누가 저 동굴수색을 하겠나?”라고 자원 의사를 물어도 자원병이 나오지 않자 “그럼 내가 들어가겠다”며 한 발짝 막 내딛는 순간 첨병인 내가 소대장을 가로막고 절벽을 기어 올라가 기습적으로 동굴 입구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M16 소총 연발로 6크립(120발)을 다 쏴 버렸다.

잠시 후 해발 1,200고지 다이디엔 산 심산유곡에서 바위를 쪼갤 듯한 총성이 멈추고 야릇하고 고요한 적막이 흐르자 소대장께서 의무병 정복용 외 소총수 3명과 함께 절벽을 올라와 합동으로 동굴수색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정글도(刀)와 옥수수 20㎏, 편지와 문서 등을 노획하고, VC를 생포는 못하였는데, ‘베트콩’은 동굴 후문을 따라 피를 흘리면서 계곡으로 퇴각한 흔적만 발견하였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VC보다 월맹 정규군의 은거지로 파악되었다.

어머니에게 쓴 어느 병사의 편지로써 “어머니! 캄보디아를 거쳐 라오스지나 절며 절며 걸어서 남으로 왔습니다”라고 쓴 대목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니 동굴 수색할 때 후문 퇴로를 차단하지 않았던 점은 작전상 실패였다.

나는 그 전투 중 헬리콥터에서 랜딩을 하다 적의 대공사격으로 로프 제동을 할 수 없어 급강하하면서 로프 마찰로 다리도 다쳤으나 역시 귀대 후 자대 치료를 받았으며 베트콩 1명을 사살하고 AK소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귀대하여 소대장께서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켜 놓고 “너희들은 사회 나가면 훈장이 필요 없다, 선임하사는 장기복무자로서 진급하는데 필요하니 이번은 선임하사가 훈장 받도록 하자, 이의 있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인 김행열은 사단장 표창을 받았다. 역시 공은 부하에게 훈장은 지휘관에게! 라는 군대 술어가 맞았다.

절친했던 주 하사, 김 하사도 전사했고, 동보산 작전 때 가장 치열하게 전투했는데 이마에 총상을 입어 머리골이 튀어나왔는데도 살겠다고 골을(뇌) 손으로 받치고 헬리콥터장까지 바위와 바위를 뛰어넘어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전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전사자는 피가 빠지면 잡아놓은 닭처럼 피부가 누렇게 변한다. 우리 중대는 그 전투에서 5명 전사로 기억한다.



부관! 저런 놈을 다 봤습니까?

무슨 전투였던지 전투 종료하고 귀대 하자말자 중대장께서 나를 중대 본부 서무계로 발령하고 부대 지휘 하에 2박3일 나트랑 휴양소로 휴양을 떠났다. 나는 꼼짝없이 서무계 일을 보고 있었다. 대대에 ‘특등사수’ 명단보고서 제출도 하면서 …. 그러나 나에게는 전선에서 서무계 일은 흥미가 없었다.

중대장께서 귀대하자마자 건의를 했었다.

“중대장님! 저 소총수로 다시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이런 놈을 다 봤나”. “너 여기 있으면 안 죽고 좋찮아” “아닙니다. 저 여기 전투하러 왔지 사무 보러 온 것 아닙니다.” 그래도 중대장께서는 한사코 중대본부 근무하라는 것이었다. “너 왜 그래, 행정 보면 안 죽고 좋 찮아?” “아닙니다.” 차마 국가 충성심때문이라 말은 못하고, “전투하고 귀국해야 친구들하고 할 얘깃거리가 많습니다”라고 변명도 해 봤다. 비로소, “그래? 부관 이리와 보세요, 저런 놈을 다 봤습니까? 그러시자 부관 박 대위께서(육사 출신) “놔두십시오. 저도 대대에서 저런 놈을 하나 봤습니다.” “그래요,” 그러시더니 우리 1소대장을 무전기로 호출하였다, “이놈을 다시 데려가세요, 전투하겠데요.”

소대장은 날 데리고 가면서 “김 병장!” “예,” “너 교회 믿지?” “아닙니다.”

뭐가 아니야 임마,” “너는 죽으면 안 돼”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 1년 연장근무 들어간 나를 귀국시켜 버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것도 다 운명인 것 같다.

내가 귀국하던 날 소대장께서는 매복작전 나가시면서 전령에게 김 병장 귀국 박스 만들어 달라고 지시하셨다. 나는 사양하고 더블 빽에 기준 피복만 넣어가지고 귀국하였다.

부산항에 귀국하고 보니 뜻밖에 상무대 법무참모(현 군사법원장) 임선규 고모부께서 마중 나오셨다. 아버지께서도 동생과 함께 마중 나오셨는데 그때 그 감격을 시인이 아니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고향에 도착하니 온 동네 사람 다 모여 안 죽고 살아왔다고 밤새도록 잔치가 벌어지고 난리가 났다. 그 시절은 나라가 워낙 가난하여 커피가 없었다. 월남에서 더블빽에 몇 봉지 넣어간 커피를 물을 얼마를 넣고 끓였는지 양동이에 가득 담아 사발로 막걸리 마시듯 나누어 마시면서 아주 신기해 했다. 나는 상무대 군법회의에서 근무하다 군 복무 35개월 만에 제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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