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자 : 2022년 10월 1일 광고문의 즐겨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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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옛 동산에 올라 ② 나의 소년시절과 청년 ‘월남전참전’ 이야기
작성자 kookbangco

▎ 옛 동산에 올라 ② / 김행열 국방전우신문 광주지사 회장

 

나의 소년 시절과 청년 ‘월남전 참전’ 이야기








청년시절 월남전
참전까지소년 시절 ‘완도 청산’에서

참전 지원 동기, ‘애국열정’

 

■ 너무도 고맙고 감사 한 이모부

이모부는 6·25 전쟁 참전 후 고향에 오지 않아 이모는 이모부의 행방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제가 우연히 같은 부대로 배치 받음으로서 “상무대 보통군법회의”(현 군사법원) 법무참모 임선규 고모부께서 그때 비로소 “이모부가 너와 같은 51사단에 근무한다”면서 한번 찾아보라고 가르쳐 주셔서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으나 직책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 후 저는 뜻을 굽히지 않고 내무반 최병직 병장에게 부탁하여 재차 파월신청을 하였으나 또 다시 이모부에게 들키고 말았다. 이모부로부터 호출을 받고 사령부에 갔더니 “저기 가서 무릎 꿇고 양팔 들고 있으라” 해 놓고 이리저리 다니시다 조카 벌 세운 것을 잊어버렸는지 팔 내리란 명령이 없어 서 내가 죽을 뻔했다.

한나절이 지나서야 가까이 오시더니 “팔 내리고 일어서”, “너 왜 월남에 죽으러 갈 여고 그래?” “네, 파견수당 받아 대학 가려고 그럽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 “전공과목은?” “네, 법대 가려고 그럽니다.” “그래! 남자는 법을 알아야 돼, 그러면 휴가 보내 줄 테니 고향 가서 형님(나의 아버지) 동의서 받아 와, 너는 인사기록카드에 ‘독자’로 되어 있어 부모 동의서 없이는 월남 못가” 라고 하셨다. 그 순간을 회고하면 지금도 기분이 째진다.

휴가는 갔지만 어느 부모가 ‘전쟁터에 가라’고 동의서를 해 주겠는가? 제가 그냥 부모 몰래 동의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그렇게 해서 그냥 이모부는 나한테 속아 명령을 내어 사단사령부 앞뜰에서 군 트럭에 실어 강원도 오음리 훈련소로 떠나 보내주면서 “살아서 돌아오너라”하며 환송해 주셨다. 그런 이모부는 돌아가시고 이 세상에 없으니 보고 싶어도 만날 수가 없다.

이모부 죄송합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납니다.

귀국할 때 양담배 한 보루라도 가지고 방문 할 줄 왜 몰랐을까, 서러움에 하염없이 눈물이 납니다. 이숙님! 용서하십시오, 조카가 세상물정 모르어린 나이였고, 청렴을 모토로 평생 살겠다는 못난 생각에 기준 피복 외에 귀국 박스를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월남 참전은, 내 생애(生涯) 최고의 가치

‘싸워서 이기고 돌아오라’는 온 국민의 뜨거운 환송을 받으며 1만2천 톤엘리자베스 호 함대에 꽃다운 청춘을 싣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가도 가도 섬 하나 보이지 않는 태평양을 주야로 1주일을 항해(航海)하여 나트랑 항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포성이 울려 퍼지고 폭격기의 굉음이 요란한 가운데 영화에서나 본 상륙선에 옮겨 타자 병사들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백마 30연대에 배치받았을 때는 연대장 장근환 대령이 연단에 서서 강연 중 “콩알만 한 실탄이 녹두 알만한 심장을 어떻게 맞추겠는가” 라면서 권총으로 사격 자세를 취하며 병사들의 용기를 북돋았다.

본인은 3대대 12중대로 명령이 났는데 중령 한 분이 “어제 12중대 OP에사고가 발생했는데 선임하사가 보급품 중 쥐약 봉투를 오렌지 주스 봉투로 잘못알고 병사들에게 오렌지 주스 라고 물에 타 먹여 여러 명 중 1명이 어려움을 당했다고 말해 주었다. ‘Rat’, 쥐라는 영어단어 하나만 알았더라도 어려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시대에는 우리 국민 문맹률이 85퍼센트였다고 기억한다.

다음날 필자는 30연대에서 디엔칸 주둔 12중대로 갔다. 가는 도중 기습적으 로 집중사격을 받았는데 알고 보니 담력훈련이란다. 부대에 도착하자마자 대 위 이석태 중대장은 중대본부 관망대 2층에서 고국에서 온 신병들을 상대로 1:1 면접을 실시했다.

그 자리에서 중대장은 필자에게 “너희가 보다시피 우리부대는 철조망으로만 둘러 쌓여있다, 베트콩이 쳐 들어오면 24시간 버틸 수 있는 무기밖에 없다, 죽어도 좋으냐?”라고 물었다. 순간 필자는 부대장의 그 물음에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도 서럽고 또 무서웠다. 그러나 곧 죽어도 “네” 라고 큰소리로 대답했다.




  김 병장은 용감했다. 총상을 입고도 계속 전투에 참가

1968년 7월 파월하여 1969년 8월 귀국할 때까지 14개월 동안 수많은 매복작전과 전투를 하면서 별 위험한 고비가 많았지만 너무나 긴 세월지나 작전명과 작전시기가 혼동되어 잘 떠오르지 않아 개괄적으로 회고해 보고자 한다.



 왕마 7호 작전

왕마 7호 작전 때로 기억한다. 그 작전에서 적과 교전 중 고지용 병장과 하사 1명이 전사하여 1소대 첨병인 본인 김행열 병장이 시체 수습하다 계속되는 적의 사격으로 인해 일시 중단하고, 또 다른 적의 진지 천연동굴을 발견하여 수색하다 적의 기습사격으로 흉부에 총상을 입었는데 방탄조끼에 걸려 관통을 못하고 실탄이 파편처럼 옆으로 누워 있었다. 가슴에 맞는 순간 “아~,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하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중대장은 병원 후송명령을 내렸지만 “제가 여기 전투하러 왔지 후송이나 가려고 왔느냐”면서 완강히 거절, 의무병 정복용 전우의 응급처치 후 계속하여 전투에 임했다.

긴급 실탄 제거 처치를 하고 압박붕대로 지혈을 한 후 일어섰을 때 소대장께서 1소대 전원을 향하여 “누가 저 동굴수색을 하겠나?”라고 자원 의사를 물어도 자원병이 나오지 않자 “그럼 내가 들어가겠다.”며 소대장이 한발 짝 막 내딛는 순간 첨병인 제가 소대장을 가로막고 절벽을 기어 올라가 기습적으로 동굴입구에 수류탄 1발을 투척하고 M16 소총 연발로 6크립〈120발〉을 다 쏴 버렸다.

잠시 후 해발 1,200고지 다이디엔 산 심산유곡에서 바위를 쪼갤 듯한 총성이 멈추고 야릇하고 고요한 적막이 흐르자 소대장은 의무병 정복용 외 소총수 3명과 함께 절벽을 올라와 합동으로 동굴수색에 들어갔다.

입구에서 ‘정글도’와 옥수수 20㎏, 편지와 문서 등을 노획하고, V.C 생포 등은 못했는데, 베트콩은 동굴 후문을 따라 피를 뚝뚝 흘리면서 계곡으로 퇴각한 흔적만 발견했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V.C보다 월맹 정규군의 은거지로 파악되었다. 어머니에게 쓴 어느 병사의 편지에서는 “어머니! 캄보디아를 거쳐 라오스지나 발을 절며 걸어서 남으로 내려왔습니다”라고 쓴 대목을 지금도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니 동굴수색 할 때 후문 퇴로를 차단하지 않았던 점은 작전상 실패였다.

필자는 그 전투에서 헬리콥터 랜딩을 하다 적의 대공사격으로 로프 제동을 할 수 없어 급강하하면서 로프 마찰로 다리도 다쳤으나 역시 귀대 후 자대치료를 받았으며, 베트콩 1명 사살과 AK소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공을 세웠으나 귀대하여 소대장께서 소대원 전원을 집합시켜 놓고 “너희들은 사회 나가면 훈장이 필요 없다, 선임하사는 장기복무자로서 진급하는데 필요하니 이번은 선임하사가 훈장 받도록 하자. 이의 있나? 없습니다.” 그렇게 해서 본인 김행열은 사단장 표창을 받았다. 역시 공은 부하에게 훈장은 지휘관에게! 라는 군대 술어가 맞았다.

절친했던 주하사, 김하사도 전사했고, 동보산 작전 때 가장 치열하게 전투를 했는데 이마에 총상을 입어 머리 골이 튀어나왔는데도 살겠다고 골(뇌)을 손으로 받치고 헬리콥터장까지 바위와 바위를 뛰어넘어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전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전사자는 피가 빠지면 잡아놓은 닭처럼 피부가 누렇게 변한다. 우리 중대는 그 전투에서 5명 전사로 기억한다.



 
< 다음 호에 계속 >







보병 9사단 백마부대 30연대 3대대 12중대 1소대

(중앙에 흰 메리야스 윤정곤 1소대장 좌측 작업모가

1소대 첨병 김행열 병장이며, 각 분대장들과 개선

기념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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