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자 : 2023년 6월 1일 광고문의 즐겨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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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청백리(淸白吏) 큰 정신④- 선조들의 청백리 정신, 잊으셨나요?
작성자 kookbangco





김 명 규 회장

()한국광고사진가협회




국가사회의 안정도(安定度)와 질서수준은 그 나라 공직자의 도덕성과 근무자세가 측정의 주요 수준이 된다. 우리의 전통적인 청백리(淸白吏) 윤리를 현실에 재조명해보고 사회가치와 신뢰도를 높여 온 정신적 인물에는 어떤 분이 계셨는지 이서행 박사의 청백리 정신과 공직윤리연구 자료를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응규(庚應圭)

유응규(1131~1175)의 처음 이름은 원규(元規)이고 자는 빈왕(賓王)이며, 관향은 무송(茂松)이다. 두 번 급제하여 내시(內侍)로 보직되었다가 갑자기 차례를 뛰어넘어 참관(參官)에 승진하였다. 남경(南京)의 수령으로 나가서는 청렴하고 간소한 정치를 숭상하여 아무리 작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아내가 해산한 뒤에 젖 앓이에 걸렸으나, 다만 나물 국물만 마시므로 한 아전이 몰래 꿩 한 마리를 선사하이 아내가 말하기를, “남편이 평생에 일찍이 남이 보내는 선물을 받아들인 일이 없었는데 어찌 나의 구복(口腹) 때문에 남편의 깨끗한 덕행을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아전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물러갔다고 한다.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이 되었을 때에 정충부가 의종(毅宗)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세웠는데, 그는 평소에 응규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내시로 불러들여 공부랑중(工部郞中)을 시키고 표문(表文)을 가지고 나라에 가서 고주(告奏)하게 하였다.

응규가 금나라에 이르니 황제가 표문을 보고 말하기를, “너의 나라가 비록 작더라도 군신의 도리와 형제의 수서는 알 터인데, 어찌 형을 폐하여 왕위를 찬탈하고 거짓말을 만들어 꾸며서 상국(上國)을 속이느냐? 마땅히 하늘을 대신할 천자의 주벌(誅伐)을 시행하여 그 죄를 징계하여야 되겠다고 하였다. 응규가 대답하기를, “전왕(前王)이 불행하게 병이 들었으며, 그 아들이 또한 총명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선부왕(先父王)의 유명을 따라 동모(同母)의 아우에게 양위(讓位)한 것입니다. 배신(陪臣)이 비록 혹독한 형벌의 죽음을 당할지라도 다시 다른 할 말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금제(金帝)가 오히려 의심하여 다만 양위하는 것만은 윤허한다는 화답을 응규에게 주었다. 응규가 아뢰기를 배신이 주청한 표문이 둘이 있었습니다. 신왕의 표문에 대하여는 어째서 회답의 조서가 없습니까? 신하가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면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하는 것이 신하의 직책입니다. 신이 지금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였으니 제가 죽어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서 본국에 돌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상국에서 몸이 죽어서 온 천하에 알게 하는 것이 났겠습니다.”하고, 음식을 먹지 않고 옷을 갖추어 뜰에 선 채 궁궐을 향하여 명령을 기다리면서 밤낮으로 자리를 옮기지 아니함이 3일이 되었다. 황제가 여러 번 먹을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먹지 아니하였다. 5일이 디니 얼굴이 여위고 숨이 금방 끊어질 것 같으며, 힘은 설 수 없게 되었다.

황제가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대신을 보내어 위로하고 타이르기를, “너의 나라가 비록 작으나 이러한 신하가 있으니 이미 문죄의 논의는 중지되고, 특히 주청대로 윤허하시는 조서가 내렸으니 너도 또한 음식을 먹고 생명을 손상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응규가 말하기를, “황제의 돌보심이 비록 후하시나 회답의 조서를 받지 않고 신이 어찌 감히 음식을 먹겟습니까?”하였다.

7일에 이르러 황제가 더욱 어여삐 어겨 즉시 회답의 저서를 주고 어찬과 폐백을 내려주어 후하게 위로하여 보내었다. 돌아와서는 그 공로로 군기감겸태자중서사인(軍器監兼太子中書舍人)에 발탁되고 금인(金印)과 자수(紫綬)를 하사하였다. < 出 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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