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자 : 2023년 6월 1일 광고문의 즐겨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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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우문예 - 단편소설 ➄ 소설가 김성열
작성자 kookbangco




어느 이등병의 귀향(歸鄕)



겨울의 짧은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며 전쟁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구름으로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다행히도 미군들의 비행기는 아무런 공습도 없이 그대로 지나갔다. 아마도 이동하는 병력들이 포로들이라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포로들의 행군은 다시금 계속되었다. 포로들이 대열에서 이탈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이동을 하며 번호를 붙이라고 한다. 분명 인원 숫자가 모자라야 하는데 누군가가 만봉 대신 번호를 댄 것 같았다. 포로들은 배가 고파 모두가 허기져 있었다.

만봉은 숨을 죽이며 국군 포로들이 다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대열이 다 지나가고 맨 뒤에 감시병이 절름거리며 힘겹게 따라가고 있었다. 그 감시병도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모양이다. 부상병까지 포로 감시병으로 배치한 것을 보아 떼놈들도 심각할 정도로 병력이 부족한가 보다. 만봉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리를 절름거리며 뒤쫓아가고 있는 감시병이 자신이 숨어있는 앞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만봉은 먹이를 낚아채는 사자처럼 뒤로 달려가 두 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감시병의 목을 졸랐다.

인간적으로는 좀 안 되고 미안했지만 여기는 전쟁터다. 때문에 나는 살아야 한다. 그러니 어쩔 수가 없다. 더욱이 우리의 전우들을, 그리고 우리를 도와 주겠다고 이역만리 먼 곳까지 달려온 연합군들을 얼마나 많이 죽이고 고통은 또 얼마나 주었는가. 그보다 더 큰 것은 우리의 통일을 가로막은 주범들이 아닌가. 그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분노와 적개심이 들끓어 오른다.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두어 명의 포로들이 힐끔거리며 잠시 뒤 돌아보았지만 더 이상 그들은 괘념치 않았다.

아마도 포로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지나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사실 자신들의 목숨도 부지하기 어려운데 남의 일에 신경 쓸 기력조차 없을 것이다. 만봉은 쓰러진 죽은 감시병의 시신을, 그들이 미군이나 우리 포로들에게 한 것처럼 똑같이 길옆 도랑창으로 밀어 버리고 그가 입고 있던 옷을 벗겨 갈아입었다. 그가 메고 있던 따발총이며 탄창 띠도 둘렀다. 누비 바지저고리에 벙거지까지 푹 눌러 쓰니 영락없는 중공군이다. 만봉은 죽기 살기로 산비탈을 향해 달렸다. 아직은 그들이 눈치를 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만봉이 도망치는 대로 눈 위에 발자국이 그대로 찍혔지만 쏟아지는 폭설은 그 흔적을 다행히도 그대로 덮어 주고 있었다. 만봉은 깊은 산속에서 며칠째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다. 가도 가도 하늘만 빤히 쳐다보이는 험한 산골이고 인적은 구경도 할 수가 없다. 여기서는 비행기 소리도 대포 소리도 전쟁터에서 풍겨 대는 그 역겨운 피비린내도, 화약 냄새도, 젊은 여인들의 비명도 들리지를 않는다. 오직 차갑고 세찬 바람과, 눈과, 그리고 파란 하늘과 한낮에는 따듯한 햇볕 뿐, 아무것도 없다.

만봉은 곡기를 구경한 지가 언제인지도 모른다. 목이 마르면 눈을 뭉쳐 갈증은 면했지만, 배고픔과 추위는 그를 더욱더 힘들게 만들었다. 눈이 허리춤까지 쌓여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나무뿌리 풀뿌리도 눈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는다. 만봉은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어느 때는 갑자기 어머니의 음성이 들리기도 하고, 고향, 냇가에서 동무들과 버들 숲을 헤치며 고기를 잡던 일들이 눈에 선하다. 눈앞에서는 허깨비가 광대춤을 춰 대고 귀에서는 죽은 젊은 영령들의 혼이 환청이 되어 들려오는 듯하다. 무릎까지 차는 눈을 헤치다 보면 어쩌다 다람쥐들이 먹다 남은 도토리 껍질을 주워 먹기도 했다. 겨드랑이가 스멀거려 옷깃을 풀고 살펴보면 자신의 몸에 착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은 이와 살이 통통하게 찐 서캐들이 떼 지어 오물거리고 있다. 모두가 살려고 아귀다툼들이다. 만봉은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그것까지 일일이 손톱으로 터뜨려 빨아 먹었다. 이제는 기력이 부쳐 움직일 힘도 없다. 자꾸만 눈이 감기고 졸음이 쏟아진다. 이대로 잠들면 그 대로 얼어 죽을 것이다. 이름도 모르는 산골짝에서 죽어 산짐승들의 밥이 될 것이다.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 해도 눈이 절로 감기고 정신이 몽롱해진다. 아무래도 이대로 죽으려나 보다. 자꾸만 정신이 혼미해진다. 바로 그때였다. 너덧 걸음 떨어진 바로 앞에서 무엇인가 바스락 소리가 들린다. 만봉이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려 보니 산 토끼 한 마리가 눈 위에서 칡넝쿨을 갉아 먹고 있었다. 그는 그 토끼가 먹이감으로 보여 급한 마음에 총으로 토끼를 겨누었지만, 그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그는 곧 깨달았다. 총소리 때문이었다.

그가 산토끼를 잡으려고 달려들었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산토끼는 만봉을 놀리기라도 하듯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좀처럼 잡히지가 않는다. 그 녀석도 만봉의 먹이가 되지 않으려고 최후의 발악으로 도망치고 있는 것 같았다.

허리춤까지 빠지는 눈 속을 쫓고 쫓으려 다 사람도 지치고 토끼도 지쳤다. 결국은 토끼를 잡겠다고 달려들던 만봉이 먼저 지쳤다. 만봉은 숨을 헐떡거리며 잠시 많은 생각을 했다. 산토끼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비유를 했다. 눈 위에서 먹이를 찾아다니는 것도 자신과 똑같고, 지금 만봉에게 쫓기는 산토끼와 자신의 운명이 어쩌면 그리도 꼭 닮았는지도 모른다. 신은 우주의 세계에서 공존하는 모든 생명 들에게 죽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쪽으로 더 힘을 실어주나 보다.

만봉은 토끼와의 식량 전쟁에서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다. 만봉은 산토끼에게 패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산토끼가 갉아먹던 칡넝쿨을 두 손으로 휘어잡았다. 엄연히 말해 토끼의 식량을 갈취한 것이다. 겨울이라 물기는 없어도 죽지 않기 위해서는 씹고 씹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칡넝쿨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나무개비와도 같은 칡넝쿨을 아무리 씹었지만 얼마나 거센지 식도를 거치는 동안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따끔거리며, 자신도 모르게 한동안 캑캑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요기라고, 배 고래의 허기에 틈새가 조금은 벌어진 것 같았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거진 나무들은 마치 원시림 같기도 한 것이 좀처럼 햇볕도 들지를 않는다. 겨울의 짧은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며 전쟁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구름으로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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