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창설은 한국의 국가정보기관 역사에서 크게 두 가지 의의를 갖는다. 첫째, 중앙정보부의 출범은 전략적 차원의 국가정보기관이 최초로 생겼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해외 정보수집 기능을 갖춘 기관으로 해외 정보를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의 책무를 수행하기 위해 2개의 장치를 갖고 있다. 하나는 국군통수권을 통해 국군을 지휘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국가정보기관의 보좌를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2개의 장치를 통해 대통령은 국가보위 책무를 수행한다. 국가안보는 군사력으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탈냉전 이후 포괄적 안보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정보이외에 다른 특별한 방법이 없다는 주장마저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국가안보의 핵심 기관인 국가정보원장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월 3일 박지원 전 민생당 의원을 내정했다. 청와대는 박 후보자 발탁 배경은 오로지 문 대통령이 “과거사보다는 국정과 미래를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언론들은 수십년 국내 정치에만 몰두해온 ‘정치9단’의 박 후보자가 어떤 정보 전문성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점, 그리고 그는 능수능란하고 치밀하며 노회한 ‘여러 얼굴의 사나이’라는 평을 연이어 보도했다. 그리고 7월27일 박 후보자의 인사청문회가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열렸다. 여기서 박 후보자의 주적개념 확인 등에 대한 질의도 있었으나, 특히 논란이 된 것은 박 후보자가 남북정상회담 개최를위해 경제협력에 관한 이면합의서에 서명을 했었는 가에 관한 문제였다. 그러나 박 후보자는 강하게 부인 했다. 그리고 인사청문회 다음날 바로 대통령은 그를 제35대 국정원장에 임명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보기관의 수장은 대통령이나 수상 등 행정수반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측근을 임명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국의 국정원장도 대통령과의 공적인 관계가 아닌 사적인 의리 관계의 인물이 주로 임명되어 왔다. 그리고 정권교체, 대내외 정책의 변화나 또는 정치적 스캔들에 따라 쉽게 경질되었다. 선진국이지만 미국도 대통령과의 친분 관계로 정보수장을 임명한 예가 있었다. 카터 대통령은 자신의 고향 친구인 터너(Stansfield Turner) 제독을 CIA국장으로 임명했고, 레이건 대통령도 자신의 절친한 친구인 케이시(William J, Casey)를 CIA국장으로 임명한 적이 있었다.
대통령과의 사적인 신뢰와 의리만이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인 국정원장을 내정하는 기준이 되어야 할까하는 의구심이 든다. 우리의 대내외 환경을 고려할 때 한국의 국정원장을 내정하는 기준은, 도덕적 윤리적인 측면은 배제하고 국가안보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기준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정보 전문가이어야 하고, 정책에 관여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을 지킬수 있어야 하며, 또한 무소불위의 권력을 남용할 가능성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국정원장은 정보 전문가이어야 한다. 그것도 해외정보에 많은 경험이 필요한 인물이 되어야 한다. 국정원은 북한을 포함한 모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국가급 전략정보를 취급하는 안보 최일선의 국가정보기관이다. 이러한 정보기관의 수장은 결코 수월한 자리가 아니다. 아무나 시켜도 되고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다. 우리의 경우 북한은 물론 해외에서 소방 호수의 물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첩보 속에서 우리 안보를 위협하는 정보를 찾아낼 수 있는 경험과 식견이 있어야 한다.
국정원의 기능은 국가안보를 담당하는 외교와 전쟁의 중간에 해당한다. 국정원은 외교방식처럼 평화적인 협상을 하는 주체세력이 아니고,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물리적인 첫돌을 지향하지도 않는다. 군대는 전시에 싸우는 기관이지만 국정원은 평시에도 싸워야 하는 국가안보의 최일선 기관임을 필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과거 이명박 정부는 처음 기대와는 달리 국정원의 정보 전문성을 크게 훼손한 인사를 지속적으로 시행해 국정원을 아무나 해도 되는 아마추어 기관으로 전락 시켰다. 그 좋은 예가 정보업무 전문성 없이 전무하다시피 한 행정관료 출신 원세훈 국정원장의 임명이었다. 그는 아직도 각종 정치공작에 연유된 혐의로 재판 중이다. 그밖에 또 다른 측면에서 신중히 고려해야 할 사항은 다음 두 가지 권력 남용에 관한 사항이다.
둘째, 국정원장의 정치적 중립 문제이다. 국가정보학에서 "정보활동은 정책결정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정보생산자는 정책 영역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책결정자들은 정보영역에 관여할 수 있다"라고 정보생산자와 정보사용자 사이의 선을 확실히 구분하고 있다. 미 CIA의 임무 설명 중에도 “우리는 정책을 만들지도 않고 정책에 대한 건의도 하지 않는다. 정책수립은 국무부나 국방부와 같은 행정부의 일이다. 우리는 행정부 지도자들이 해외 정책을 만드는 것을 돕기 위해 최선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라는 내용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정보생산자가 정보사용자인 정책결정자의 정책수립에 관여하거나 영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정원 업무의 초점도 국가안보 사안에만 맞추어져야한다. 대통령을 돕는 일반정책 분야의 일을 국가정보기관이 담당할 여유가 없다. 무엇이 국가안위를 위협하는가가 최우선이 되어야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최대 국가안보 위협요소는 북한이다. 따라서 국정원의 정보업무는 대북 정보업무가 전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우리 국정원이 일개
정권의 정보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국민을 위한 정보기관이 되어야 한다. 특정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라 국민과 국익을 위해 헌신하는 국가안보의 첨병이 되어야 한다. 국가정보기구가 특정 정책을 선호할 경우 원하는 방향으로만 정보를 수집하고 생산하게 되어 국가정보의 정치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는 국가정보기구의 대표적인 권력남용이다.
셋째, 국가정보기관의 수장인 국정원장이 권력을 남용할 소지가 없어야 한다. 이는 정치적 중립과도 맥을 같이 하는 사항이다. 특별히 정치적 목적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해 정보가 사용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우리의 최근 정치사에도 1979년 전두환의 신군부가 정권 장악을 위해 국군보안사령부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밖에도 정보기관이 수행한 불법적인 활동이나 비윤리적인 행위 사실을 최고결정자가 전혀 알지 못하거나 알고도 통제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FBI는 후버(John Edgar Hoover)국장 재임시절 후버 국장이 선호하는 대통령 후보를 지원하는 등 선거에 불법적으로 개입 했으며,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불법 도청이나 미행감시 등 비윤리적인 활동을 저질렀다. 트루먼과 케네디 대통령을 비롯한 여러 대통령들이 그를 해임시키려 시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일설에는 후버 국장이 대통령들의 약점을 너무 많이 알고 있어 해임을 못시켰다고도 한다. 후버 국장은 1924년 취임 이후 48년 동안 국장직에 있었다. 그가 사임한 후, 1976년 의회는 권력남용을 막기 위해 국장임기를 10년으로 제한하고 대통령이 정치적 이유에서 바꾸지 못하게 의결했다.
국가정보체계의 민주화로 의회와 여론의 정보활동에 대한 감시기능이 강화되었을 지라도 이처럼 정보기관의 수장은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에 잘못된 인물을 임명하게 될 경우 정권 유지는 물론 체제 안위에 심각한 위협을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일반 부처의 장차관과 달리 정보기관의 수장을 임명함에 있어서 보다 신중한 선택과 결정이
필요하다.
새로 취임한 제35대 박지원 국정원장이 위에서 열거한 자격을 얼마나 첫족했는지 또는 할 것인지를 언론 보도만 보고 피상적으로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한 독자들의 견해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부가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과 절차도 결과에 못지않게 공정하고 정의로워야 함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박 후보자는 지명을 받은 직후 “역사와 대한민국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님을 위해 애국심을 가지고 첫성을 다 하겠습니다. 앞으로 제 입에서는 정치라는 정(􈢚)자도 올리지도 않고 국정원 본연의 임무에 첫실하며 국정원 개혁에 매진하겠습니다.”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고 한다. 안보전문가들은 국가정보기관을 국가안보의 ‘제1방어선’이라고 부르고 “국가안보는 총구가 아니라 정보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한다. 신임 국정원장이 올린 폐이스북 맹서의 글 중에서 특별히 “대한민국”과 “국정원 본연의 임무”라는 말에 첫실해 주기를 바란다.
 
 

 
저자 약력
필자 장호근은 전투조종사 출신 예비역 공군 소장으로 정치학 박사다. 현재 한국독도연
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현역 시절에는 주미 대사관 공군무관, 비행단장, 연
합사 정보참모부장, 국방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했으며, 2002년 전역 후 GE Aviation에서
전무이사로 근무했고, 미국 하버드 케네디 스쿨의 Belfer Center에서 연구원, 그리고 한국
위기관리연구소 선임연구위원, 한국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 대한민국 공군
발전협회 (초대)연구위원장으로 (현)항공우주력연구원 창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주요저서로
는『예방외교』(2007년), 『6·25전쟁과 정보실패』(2018)가 있으며, 그 외에 다수의 안보관
련 논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