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전우여!

황 문 길 회장

1989년 7월 5일 월남참전용사들의 모임인 따이한회 전적지 방문단 14명의 일원으로 베트남을 다시 찾은 나는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지난 1965년 8월 맹호마크와 일병 계급장을 달고 월남 땅을 밟은 지 24년. 비행기에서 내려 탄손누트 공항청사로 들어가기 위해 활주로를 걸으며, 포연 속에서 생사를 함께 했던 전우들의 얼굴을 그려보았다. 김 상병, 박 상병 …. 이제는 40대 후반의 장년이 되었을 그들의 모습이 엊그제 만난 듯 너무나 또렷하게 떠올랐다

군데군데 부서진 모습의 텅 빈 격납고와 퇴색한 통제탑이 눈에 띄었다. 세계 각국의 비행기가 수시로 드나들던 활주로에는 낮선 베트남 국기를 단 비행기가 몇 대 서 있을 뿐 너무나 한산한 모습이었다.

숙소인 큐퐁 호텔에서 창을 열고 시가지 정경을 바라보고는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의사당 앞 아파트 옥상의 일본상품의 선전문구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선전판처럼 도시전체가 도색작업을 하기 위해 페인트를 볏겨 놓은 듯 을씨년스런 모습이었다. 거리를 오가는 시민들은 무표정했고, 오토바이를 타고 아오자이 자락을 펄럭이며 사이공 시내를 질주하던 월남여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인민위원회에서 우리를 특별히 예우하여 전국에 3대 밖에 없는 에어컨 달린 24인승 버스를 배당해 주었다는 안내원의 설명을 들으며 주월 사령부를 찾아갔다. 정문 기둥도 건물모습도 옛날 그대로였다. 주월 한국군을 총 지휘하던 사령부 자리를 지금은 사이공 관광공사가 사용하고 있었다.

웬주가에 있는 한국대사관을 찾았을 때는 건물신축기념으로 새겨놓은 머릿돌이 없어진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한국군이 만들어 기증한 팔각정, 한국인들이 많이 투숙하던 캬라벨 호텔, 사이공 강가의 선상식당까지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였다.

지안의 비둘기부대 정문 초소에는 ⌜위병소⌟라는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고 부대장 숙소 옆 건물에는 비둘기부대의 마크가 윤곽만 남아 있었다.

차례로 방문한 청룡맹호백마십자성부대 모두가 상황은 비슷했다. 부대표지판들만이 앙상한 뼈대를 들어낸 채 남아 있었고, 부대 막사는 대부분 월남군이 주둔하고 있거나 주민들의 숙소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국군 주둔지와 많은 전우들이 목숨을 바친 격전지의 흙을 봉투에 담아 왔다. 군용 트럭을 개조한 목탄차가 아직도 운행되고 있었고, 헬리콥터와 탱크장갑차 등의 잔해가 그대로 길가에 방치되어 있었으며, 전쟁 중에 파괴된 교량과 건물은 겨우 응급복구만 한 채로 사용되고 있었다.

월남의 공산화 이전, 민주화를 외치며 매일 같이 데모대의 행렬이 거리를 메우던 사이공의 변모를 보며 공산화 15년을 맞은 월남사람들은 결국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은 것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는 파월전우들의 젊은 기개와 혼이 서려 있는 정글을 내려다보며 격전지에서 파온 한 줌 흙이든 봉투를 내내 가슴에 안고 있었다. 비행기가 방콕 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벅찬 감회에 목이 메어 한마디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출처/다시가 본 베트남/1990년 3월5일 발행/저자 오강석 동아일보 사진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