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이등병의 귀향(歸鄕)

“말자는 남편의 혼백을 하얀 백지로 싸고 또

쌌다. 오두막에서 살 때 적어준 남편의 고향

주소도 함께 포장을 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기요. 내, 동무의 남편 무덤을 알고 있으니 언제라도 시간이 나면 술이라도 들고 가 한 잔 부어야 되지 않겠소. 동무가 원한다면 나도 함께 가서리, 죽은 동무의 무덤 앞에서 용서를 빌어야 내마음도 편할 거구만. 내 진심으로 하는 말이다. 자식들이 남매라 했소. 이들은 내거 손을 써서 편한 자리로 부탁을 해놓았소. 국경 수비대에서 당과 수령 동지를 위해 충실하게 근무를 하고 있다는 보고를 내 자주 듣고 있소. 고등중학교를 나온 딸도 수단이 좋아서 중국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밀수 장사로 돈도 제법 벌었다고 하지비. 아마도 오늘 집으로 돌아가면 곧 아들도, 딸도 며칠 내로 찾아올지도 모르디. 그리고 앞으로라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을 하기요. 내 힘닿는 데까지 신경을 써 줄거구만. 그러면 잘 가시라요.”

말자는 남편 일만 빼고는 모두가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난 일 모두 다 잊혀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더욱이 아이들이 잘 있다는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놓이면서 힘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는지 그 무겁던 몸이 하늘을 날 것처럼 가벼워졌다. 지옥 같은 곳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혹시나 했으나 그 소장의 말은 모두가 사실이었다.

말자가 살기에는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나지막한 언덕 위에 남향이라 겨울에도 무척 따뜻할 것 같았다. 얼마나 많은 세월 동안 햇볕이라고는 구경도 할 수 없는 교화소 밖으로 나와 햇볕을 쬐니 눈이 부시고 이제는 밥은 굶어도 살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도 봄의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린다. 남편은 그렇게 무참하게 죽어 갔지만 세월도 흐르고 했으니 이제는 소장의 마음을 받아 드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웃집들이 텅텅 비어 있었다.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간 집도 있지만, 남조선으로 내려간 사람이 태반이라 했다.

하룬가 이틀이 지나자 소장의 말 대로 아들이 왔다. 몇 년 만에 만나는지 기억도 할 수가 없다. 아들은 그래도 잘 자라 주었다. 제 아버지를 닮아 그런지 체격도 우람하고 건강했다. 그런 아들을 보니 남편 생각이 떠올라 가슴이 터질 듯했다. 아들은 만나자마자 귀에 대고 속삭인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하고 곧 큰일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아무도 모르게 하나하나 준비를 해야 한다고 했다. 말자는 아들에게 큰일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묻고 싶었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없어서 그런지 몰라도 말자는 이미 모든 일을 자신도 모르게 아들에게 의지해가고 있었다. 아들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모든 게 이미 하나로 통하고 있었다. 아들이 돌아가자마자 말자는 서둘렀다. 무엇보다도 소장이 일러준 대로 남편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 죽은 남편의 혼을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 비가 제법 뿌리기 시작한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다.

개울을 건너고 야트막한 산등성이를 서너 개를 넘자 오르막길에 특별하게도 알음들이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풀 한 포기 없는 민둥산이라 찾기는 쉬웠다. 소나무 옆으로 바위가 하나 있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세 번째가 남편의 무덤이라 했다.

말자는 준비해간 옥수수로 빚은 막걸리를 따라 남편의 무덤 앞에 잔을 올렸다. 몇 년 만인지도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하며 눈물이 쏟아진다. 남편을 만나면서부터 행복했던 순간들이 떠올라 마음속으로 통곡을 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말자는 남편의 술잔을 한 모금 음복을 하고 남은 술들은 무덤 위에 뿌렸다. 그리고 삽으로 남편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남편의 시신은 너무나 얕게 묻혀 있어 조금만 팠는데도 유골이 나왔다. 양지바른 언덕 인데다가, 토질이 좋아 그런지 남편의 육신은 이미 모두가 흙으로 변해 있었고, 허연 유골만 가지런히 남아 있었다. 말자는 남편의 유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준비해간 창호지로 싸서 용기에 정성스레 담았다. 혹 남의 눈에 띌까 걱정이 되어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 말자는 마음이 급했다. 사람들이 눈치채지 않게 아궁이에다 미리 준비해둔 장작더미를 차곡차곡 고이고 그 위에 남편의 유골을 올려놓은 다음 기름을 뿌리고 불을 붙였다. 장작에 불이 붙자 유골 타는 특유한 냄새가 어찌 심한지, 말자는 앞마당에다 말린 쇠똥과 쑥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팔자의 생각대로 혼백을 하얀 백지로 싸고 또 쌌다. 그리고 맨 위에는 ’대한민국 육군 이등병 박 만 봉‘이란 이름이 찍힌 인식표와 오두막에서 살 때 적어준 남편의 고향 주소도 함께 담아 포장을 했다. 남편은 살아 있을 때 혹 자신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더라도 유골 만은 고향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때마다 말자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다.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