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일자 : 2026년 8월 01일 광고문의 즐겨찾기
오피니언/컬럼
오피니언/컬럼
오피니언/컬럼
> 오피니언/컬럼
제목 1958년,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하다
작성자 kookbangco




송 병 승

이봉창의사선양회

호국영웅연제근기념사업회 이사

 

1958년 4월,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해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처음으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참배했다. 4년 재학 중 현충원은 나에게 애국심을 고취했고 대한민국이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값진 피로 이어가는 위대한 조국임을 깊이 깨달았다.

강의가 끝난 날, 또는 공휴일이면 한강을 바라보며 동작동 현충원을 찾았다. 선열과 영령 앞에 고개 숙여 묵념하며 내가 대학생이 된 영광, 꿈을 키우는 젊음이 헛되지 않도록 여기저기 잠들어 있는 영령을 기리며 긴 시간을 보냈다. 3학년이 되어 4·19 민주혁명이 일어났다. 한강교, 삼각지, 남대문, 시청, 경무대 앞까지 시위하며 부정부패는 반드시 심판 받는다는 정의를 몸소 체험했다. 다음 해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격변기를 보낸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방의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서울과 먼 거리에 있어도 상경하면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았고, 학우 여섯이 잠들어 있는 강북구 수유리 국립4·19 민주묘소를 찾았다. 젊음을 조국에 바친 학우는 물론 초등학생과 중년을 넘긴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산화한 영령 앞에 고개 숙여 묵념했다.

37년 여 중등교단을 지킨 나는 반공, 멸공, 승공이라는 이름 속에 학생들에게 6·25전쟁이 어떻게 발발했고 수많은 국군이 전사하면서 38선을 넘어 휴전선을 수호했는가, 가슴 속에 심어주었다. 저 멀리 단군조선 이후 삼국시대 발해와 고려, 그리고 조선 왕조까지의 수난사를 가르쳤다. 8·15의 광복이 우리 선열의 값진 피로 1950년 6·25전쟁이 영령들이 바친 피로 굳건하게 지켜가고 있는 생생한 현대사를 심어주었다.

교단을 떠난 나는 80 고개를 넘으면서 남은 인생,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고심하며 사단법인 호국영웅연제근기념사업회 회원이 되었다. 오랜 인연을 맺은 연제은 이사장과 예비역 육군 장성이신 김남권 회장과 서로 뜻이 맞아 기념사업을 구상하고 실적을 남겼다. 서울현충원을 찾으면 맨 먼저 27묘역 군번 1701722 호국영웅 연제근 묘소를 참배한다. 1930년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에서 태어난 영웅은 6·25전쟁 전인 1948년 1월 30일 국방경비대에 자원입대했다.

1919년 육군 3사단 22연대 1대대 분대장으로 여순 반란 공비토벌작전에 참전 공비 아홉 명을 생포했다. 1950년 9월 17일 특공대 대장으로 형산강 전투에서 도하 통로를 개척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인민군의 기관총 진지를 박살냈고 이를 계기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리 수행한 단초를 우리 연제근 영웅이 이루어냈다. 어찌 청사에, 한국 전쟁사에 빛나지 않으랴? 스물둘의 젊음을 오로지 대한민국을 위해 바친 불타는 충성, 애국심을 추모하지 않으랴? 을지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을 연제근 영웅에게 추서했지만 그 이상의 훈장으로 가신 임을 추모함이 마땅하다.


나는 4계절이 순환하는 속에 시시때때로 국립서울현충원을 찾고 있다. 살아계시다면 90세를 넘긴 연제근 영웅은 ‘나는 언제나 20대 청춘이고 후손들이 위대한 대한민국을 지켜 달라’고 당부하실 것이다. 어제도 오늘도 무궁화는 피고지고 또 피면서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을 겨레의 성역 속에 애국혼의 명복을 빌고 있다.

시간을 내어 현충원을 참배하련다. 그리고 호국영웅 연제근 묘소 앞에서 형님! 찾아뵙니다. 높은 뜻 이어받아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으로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맹세할 것이다.


드림권내과의원 광고 배너
종로아산 광고 배너
서울 나은병원 배너
메디홀스 요양병원 배너
성문치과병원 광고 배너
시흥 광고 배너
에스탑치과의원 광고 배너
서울엘리트 광고 배너
행정심판사무소 광고 배너
HB ENC광고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