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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만에 귀환한 어느 이등병

밤이 깊었다. 수호가 막 잠이 들려는 데 전화기가 울려 댄다. 그는 눈을 비비며 머리맡에 있는 전화기를 집어 들면서 귀찮은 듯 구시렁거린다.

“누구 야~ 이 밤늦은 시간에 ….”

“… …” 전화기에서는 잠시 윙윙거리는 잡음이 들리더니 상대편에서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여보세요, 거기가 박수호 씨 댁 맞나요?”

“예, 그런데요, 제가 박수혼 데요.”

“그러면 혹, 박. 만. 봉 씨라고 아시나요?”

수호는 갑자기 박만봉이라는 이름이 떠오르지를 않는다. 박만봉. 박만봉. 그는 몇 번이고 혼자 되 뇌이다 말고 더 이상 떠오르지를 않아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응답을 했다.

“여기는 박만봉이라는 사람 없어요.”

“그러면 혹 …”

“그런 사람 없다니까 자꾸 그러시네. 전화 끊어요.”

수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냉수를 한 사발 들이키고는 화장실에 다녀와 잠자리에 다시 누웠다. 선잠을 깨서 그런지 쉽게 잠을 이를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전화기에서 듣던 박만봉이라는 이름이 자꾸 귓가를 뱅뱅 돌며 떠나지를 않는다. 많이 듣던 이름 같은데 얼른 생각이 나지를 않는다. 잠자리에서 얼마동안을 뒤척이던 그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벌떡 일어났다.

“박 짜. 만 짜. 봉 짜는 백부님의 함자가 아닌가. 얼굴은 모르지만 분명 625전쟁 때 학도병으로 지원한 양아버지의 이름이다.

그제 서야 수호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은 것을 후회했다. 전화번호라도 적어 둘 것을, 그러나 모두가 소용없는 일이다.

 요양원에서 아들 박만봉을 외우며 사시는 할머니

전쟁터로 나간 큰아들이 소식이 없자 대를 이려는 급한 마음으로 할머니는 서둘러 작은 아들이 난 손주, 수호를 큰아들인 박만봉의 양자로 호적을 올린 것이다. 수호는 혼자 중얼거린다. 그때가 벌써 언제 적 일인데, 반세기도 이미 지난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하던 수호가 이번에는 생각을 다시하기 시작했다. 백부님의 이름이 사실이라면 전쟁 때 전사도 아니고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했다. 전선에서는 총성이 멎고 휴전이 되면서 포로교환이 있었지만, 큰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않으셨다. 그러니 모든 정황을 보더라도 박. 만. 봉 이라는 이름이 동명 2인 일거라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면서 잠시 어수선했던 머리가 차츰 정리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새벽녘이 다되면서 수호는 어제 밤 일어난 일들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수호는 날이 밝으면서 석 달 전 요양병원으로 모신 할머니를 뵈러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할머니는 올해 구십이 되셨다. 작년 까지만 해도 정정하셨는데 갑자기 우울증에 치매까지 겹쳐 왔다. 수호는 되도록 집에서 모시고 싶었지만 농번기 철이라 할머니의 시중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강점기시절 징병으로 끌려가셨으나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시지를 않으셨다. 그때 끌려간 사람들은 대부분 일본군으로 편입이 되어 남양군도로 끌려갔을 거라고 모두들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제사를 일본 헌병 놈들에게 끌려가던 1941년 섣달 초일해 날로 모셨다. 할머니는 딸 하나에 아들 형제를 두었다.

딸은 여학교를 다니다가 가출을 하여 기지촌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생활하다가 마약중독으로 세상을 마감했다. 남편은 그런 데다 전쟁터로 나간 큰아들마저 소식이 없자 이제나 저제나 아들의 기별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다 할머니는 지쳐버렸다. 그런 일들이 쌓이고 쌓여 우울증에 치매까지 얻으셨다. 참으로 할머니의 운명은 너무나도 기구하시다. 압박과 설음이었던 일제강점기, 해방의 감격과 잔인한 전쟁, 그 격동기 속에서 할머니라는 여인의 시대는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으로 한 시대를 사셔야만 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할머니의 가슴속은 얼마나 피 멍이 드셨을까. 그렇다고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다. 원망을 한다면 한없는 이 나라의 백성으로 태어났다는 죄밖에는 없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제치하에서 해방은 되었으나 그 당시 강대국들은 반만년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오던 우리나라를, 아이들 사방치기 하듯 금을 그어 놓고 민족상잔이라는 대리전까지 치르게 만들었다. 생각 하면 할수록 우리 주변에 출몰하는 식인 상어들은 다른 어족들에게는 여간한 고통이 아니다. 그것도 가장 난폭하다는 백상아리들이다.

그 백상아리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항상 우리 주변에서 맴을 돌며 호시탐탐 한반도를 노리고 있다. 이 나라, 이 시대의 민초들 중에 우리 할머니가 끼어 있다는 게 수호는 가슴이 먹먹해 진다. 할머니는 병원으로 가시기 전 까지만 해도 초하루 보름이면 언제나 장독대에 정안 수를 바쳐 놓고 소식이 없는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셨다. 지금도 요양원에서는 어쩌다가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오시면 박.만.봉 이라는 아들의 이름을 입에 달고 사신다고 했다.

 조국을 위해 학도병으로 입대한 박만봉

1950년 6월25일, 삼팔선을 돌파한 북한군들은 한강을 건너 안양과 수원을, 그리고 대전을 지나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낙동강만 건너면 대구와 부산 함락은 시간문제요, 소위 그들이 말하는 한반도 적화통일이 눈앞에 보였다.

때문에 남이나 북이나 사활을 건 전투였다.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모든 병력과 화력을 낙동강 전투에 집중했다. 치열한 전투로 시체들이 여기저기 나 딩 굴고 부상병들의 비명이 총성과 함께 뒤섞여 들려온다. 그토록 푸르던 낙동강은 붉은 피로 물들고 삼천리금수강산은 초토화 되었다.

만봉은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학교는 이미 방학이 되었으나 만봉은 학교로 달려갔다. 학교 교정에는 벌써부터 수많은 학생들이 구름같이 모여들고 있었다. 모두가 머리띠를 두르고 풍전등화 앞에 놓인 조국을 구하기 위해 전선으로 가자고 외쳐 대고 있었다. 학생회장이 연단으로 올라갔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연설은 조국을 위해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하나의 절규였다.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우리들 모두는 하나가 되어 싸워야 됩니다. 우리의 조국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의 붉은 피로 조국을 지킵시다. 우리 모두 전선으로 나갑시다.”

학생회장은 많은 학생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학생들은 이미 대기하고 있던 트럭에 실려 임시 교육대로 입소를 했다. 만봉은 교육대에 입소한지 사흘이 되었다. 제대로 교육을 받으려면 한 달도 더 돼는 일정인데도, 전선에서는 시간을 다툴 정도로 보충할 병역이 필요했다. 워낙 급한 터라 교육을 충실히 받을 수가 없었다. 제식훈련은 아예 염두도 못 냈다. 총검술도 대충대충 명칭만 암기하고 소총도 겨우 방아쇠 격발요령만 숙지한 체 전선으로 투입되었다.

함께 훈련을 받던 동기들은 뿔뿔이 헤어졌다. 만봉은 처음 입어보는 군복에 완전 군장을 갖추고 차에 올랐다. 철모를 눌러 쓰고 M1 소총을 멘 어께가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너희들의 행운을 빈다.”

손을 흔들며 새까맣게 그을린 얼굴에는 전쟁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찬 어린 조교의 모습이 좀처럼 지워지지를 않는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