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공비 서른 한명을 만난 것은 1968년 1월 18일인가 19일경 새벽 동이 틀 무렵이었다.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새벽이면 평소와 같이 나의 방식대로 극기 훈련을 하루도 빠트리지 않고 진행해왔다. 문고리에는 성애가 하얗게 끼고 손바닥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매서운 추위에서도 계속됐다. 그래도 반바지에 반팔차림인데다, 신발도 다 떨어진 운동화를 신었다. 그것은 ‘불가능이란 없다, 하면 된다’는 군인정신으로 무장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실록(朝鮮實錄)에도 자주 나오는 소령원 뒷산 작은 능 상봉 정상에 오르려면 비탈이 어찌나 심한지 코가 땅에 끌릴 정도이다. 호흡이 가파르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아무리 추어도 등에서는 땀이 흐른다. 일명 ‘까마귀 봉’이라고도 부르는 산 정상에 오르면 날 좋은 날에는 개성 송악산이 아련히 보이는가 하면 한강과 임진강이 서로 만나 서해와 합류하는 삼도 품도 보인다.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로 625한국전쟁 당시에는 중공군들이 토치카를 파고 미군들과 교전을 벌이던 곳이기도 하다. 헬기장도 만들어 놓은 이곳은 사흘이 멀다 하고 북상하는 간첩, 남하하는 간첩들이 출몰을 하는 길 몫이다.

산 정상에서 육군 도수체조를 마치고 내리 막 길을 타기 시작했다. 무서움을 떨치려고 흥얼흥얼 콧노래도 불렀다. 한참을 내려 오다보면 산 중턱에 화전민들이 숱을 굽던 숱 가마터가 있다. 그 숱 가마터에는 한길도 넘게 억새풀이 우거져 있어 바람이 새 차게라도 불면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바람을 막아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다른 날과는 달리 그곳에는 시커먼 무리들이 삼삼오오로 모여 앉아있었다. 얼핏 보아 1개 소대 병력은 되는 것 같았다. 그것도 하나같이 무장을 하고 시선들은 온통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머리카락이 갈대처럼 서고 전신에는 땀이 흘렀다. 그 순간에도 나의 뇌리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이 깊은 산중에 그것도 꼭 두 새벽에 저자들은 혹시 북파공작대? 아니면 특수부대들의 야간훈련을,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나 많은 병력들이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나는 그들이 보거나 말거나 이곳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저들이 어떤 시비라도 걸면, 한 둘이라야 어떻게 해보기라도 할 텐데 일개 소대 병력에 무장까지 하고 있다. 이미 나의 운명은 저들에게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덧 그들 앞을 한 10여 미터쯤 지났을까. 좀 더 빠르게 달리려는 데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봐요, 이리 빨리 와요?”

하지만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그대로 내달릴까 했지만, 저들은 총을 들고 있지를 않은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들도 내가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 마음이 상했던가 보다.

“여보! 이 산중에 당신밖에 없는데 뭘 그리 두리번거리고 있는 거요, 빨리 오지 않고,”

‘순간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한다.’고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운명이 걸린 상태이다. 그들은 나를 얼마든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묘하게도 서로가 피해갔다. 그들이 북에서 침투한 무장공비라는 것은 신 밖에는 모를 일이다. 아니 어쩌면 신도 모를 수가 있다.